2006년 07월 20일
[정신분석학적 작곡가 탐구] 요하네스 브람스
서양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시대였던 19세기의 음악적 창조는 거대한
두 그룹의 천재음악가들에 의해 주도된다.
한 그룹은 1810년을 전후해 탄생한 작곡가들로, 1809년생인 멘델스존,
1810년생인 쇼팽과 슈만, 1811년생인 리스트, 1813년생인 바그너와
베르디 등이다. 또 하나의 그룹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태어난
작곡가들로, 1860년생인 볼프와 말러를 필두로 한 드뷔시(1862년), R.
슈트라우스(1864년), 1874년생인 쇤베르크와 아이브스, 그리고
1882년생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그들이다.
이들 두 그룹의 음악 천재들 사이에 한 거인이 외롭게 서 있으니,
그가 바로 영원히 고독했던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이다.
그렇다면 브람스는 어떤 인물인가? 야누스적인 이중적인 면들은 그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는 바로크 음악과 고전 음악의 전통에서 영감을
찾았으며, 한편으로는 당시로서는 매우 앞서가는 모더니즘의
화신이었다.
그는 고향인 북독일에 대단히 헌신적이었으면서도 생의 대부분을
남유럽에서 보냈으며, 말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또한 부모를
흠모하고 가정생활을 동경했으나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에
대해 대부분의 전기 작가들은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지만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한 매너를
보였다’는 말도 늘 따라붙는다. 그는 지독하게 독립적인 사람이었으나
친구나 친지들의 죽음을 통렬히 애도하곤 했다. 또한 그는 일생 동안
꽤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검소하게 살았으며 항상 가난한 사람처럼
옷을 입었다.
이상에서도 볼 수 있듯 브람스는 매우 별나고,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 어쩌면 이런 혼란이 바로 그가 원했던 바였는지도
모른다. 브람스는 그에게 가까워지려는 대부분의 노력들에 대해
저항했다. 그를 자세히 알려고 했던 이들은 언제나 접근을 거절당했다.
그와 가장 가까웠던 클라라 슈만조차도 “그와 5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의 성격과 사고방식에 대해 어떤 통찰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브람스는 많은 원고자료들과 개인적인 문서들을 고의적으로 파기했다.
그의 이런 침묵은 그가 무엇인가를 숨기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더 많은 관심을 받아내기 위함이었을까? 어떤
정신분석가들은 그의 익명에 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는
이해받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브람스의 음악적 성장은 아버지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호른·플루트·비올라·콘트라베이스 등을 연주할 수 있는
열광적인 음악가였다. 시골 출신인 아버지는 마을악단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때문에 집안의 전통적인 가업인 농사일에는 무관심했다.
그는 음악가로서 보다 나은 생활을 꿈꾸며 함부르크로 이사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는 도시의 댄스홀이나 마칭밴드에서 연주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24세 때 안정된 생활을 위해 결혼했다. 그가 선택한 신부는
41세의 훌륭한 요리사이자 재봉사였지만, 불구였다. 그녀는 가족을
갖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젊고 잘생기고 건강한
음악가를 선택한 것이다.
브람스는 빈민가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거친
놀이보다는 여자아이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섬세한 아이였다. 두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브람스는 특출났지만 막내는
평범했다. 그러나 그 시절 브람스는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음악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는 침착하지 못했고, 늘
불만이 많았으며, 어머니와의 사이도 점차 나빠졌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장사를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는 바람에 자주 이사를 다녔다.
결국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아버지는 18세 연하의 여자와 재혼하게
된다.
브람스는 피아노를 선택했는데 체계적인 피아노 레슨을 주선한 것은
어머니였다. 스승은 브람스의 비범함에 놀랐고, 열 살도 되기 전에
공개연주를 하게 해주었다. 브람스는 분명 신동이었고, 특히 작곡에서
놀라운 자질을 보였다. 흥행주들은 그를 모차르트처럼 순회연주시키기
위해 스카웃하려고 했다. 아버지는 돈버는 방법으로써 이러한 것을
환영했지만 스승은 브람스의 재능의 착취에 반대했다. 결국 스승의
뜻대로 브람스는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대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다. 그는 선술집에서 노래를 하고 피아노를 쳤으며,
레슨과 편곡도 했다. 불과 13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경제적 사정으로 14세 때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는데, 그 점은
그를 항상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나중에 엄청난 독서를 통해 이것을
보상하려고 애썼다. 그의 작품은 16세 때부터 출판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익명으로 되어 있다. 그는 초기에 많은 편지와 작곡에 익명을
사용했다. 그리고 나중에 청년기에 썼던 대부분의 작품을 없애 버렸다.
슈만·클라라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창작 세계에 눈떠
19세 때 그는 긴 연주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서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는 많은 음악가들을 만나게 된다.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을
비롯해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리스트·슈만과 클라라 등이 그들로,
이들은 브람스의 생을 통해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던 절친한
사람들이었다.
브람스와 슈만 부부와의 만남은 세 사람 모두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브람스의 예술적 성장에 있어 슈만과의 만남은 두 사람이 신비하게
일치되는 어떤 교감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슈만은 브람스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슈만은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들에 감탄했다. 그것들은 ‘숨은
교향곡’이라고 불렸으며, 신문에서 그를 크게 다루었다. 브람스는
슈만의 영향 아래 그의 보다 고전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동시에 고도로
낭만적이고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슈만은 브람스를 만난 지 5개월 후 자살을 기도했고 입원했다.
브람스는 당시 임신중이던 클라라를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그녀에게
갔다. 클라라는 브람스로부터 위로받고 브람스는 그녀와 아이들까지
돌보았다. 브람스는 그녀의 집에 거주하면서 슈만의 책과 악보를
정리했고, 재정적 책임과 아이들의 아버지 역할까지 도맡았다.
브람스는 새로 태어난 아이의 대부가 되었으며, 클라라를 무대에
복귀시켰다. 당연히 강한 끈이 두 사람 사이에 자라나게 되었다.
브람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종종 나는 그녀를 팔로 감싸안으려는 나자신을 자제해야만 한다.
아마 그렇게 했더라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과연 연인 사이가 되었을까? 그들이 육체 관계를 가졌을까
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점이다. 클라라의 막내
아이는 브람스를 닮았다고도 한다. 가장 유력한 설은 그들이 상대에게
푹 빠져 있던 시기에 어떤 육체적 관계가 시도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둘에게 만족스럽지 못했고 빨리 이전의 관계로
돌아갔으며, 둘에게는 죄책감과 실망감이 남았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슈만이 입원하고 있던 시기에 슈만은 자신의 경력이 멈추어 있는 동안
브람스가 얼마나 많이 발전하고 있는지를 알고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또한 아내와 브람스 사이의 애정을 감지했던 것 같다.
1856년에 슈만이 죽고, 1865년에는 브람스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에게는 개인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독일
레퀴엠’에 착수했고, 그것은 슈만이 그에게 주었던 아이디어였다. 이
‘독일 레퀴엠’은 이중의 추모였다. 즉 그를 낳아 길러준 여인과 그를
유명해지도록 도와준 남자, 즉 어머니와 슈만을 향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브람스가 진정으로 성공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레퀴엠’으로
그는 유럽에서 중요한 음악적 인물로 자리를 굳혔을 뿐만 아니라, 그후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렸다.
끊임없이 자신을 고독속에 가둔 억제된 우울증
브람스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과의 친밀함을 피했으며, 늘 고독했다.
어린시절 이미 외롭고 은둔적이었으며, 혼자 피아노를 치거나 가장
좋아한 수집품인 장난감 병정들을 가지고 놀았다. 어린시절 그의
군대놀이는 군악대에 소속된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사랑이 승화된
표현이었으며, 이 일로 인해 그는 평생 군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대표적인 고독에 대한 추구는 역시 독서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를 하는 데 투자했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성경·고전·역사·르네상스 예술·음악가의 전기·시 등에 정통했다.
그것은 당연히 그의 부족한 교육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교육의 결핍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썼으며, 인텔리들과
문학과 예술을 토론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또한
그는 악보나 자서전 원본·희귀본 등의 광적인 수집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는 거칠었다. 그는 자신의
서투른 표현법을 인정했고 자신의 말을 두려워했다. 이 점은 그의
사회적 고독을 더욱 부추겼다.
그는 고독하면서도 성실했다. 항상 아침 5시에 일어났고 많은 블랙
커피를 마시며 정오까지 쉬지 않고 작업했다. 저녁에는 콘서트나
오페라 공연에 갔으며, 14년 동안 줄곧 같은 식당을 드나들었다. 그는
오래된 집을 좋아했으며, 여행할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잘
차려입지 않아도 되는 수수한 여관에 머물렀다. 그는 옷 매무새는
단정치 못했으며, 머리가 헝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보였다.
그는 고정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 함부르크 필하모닉의 지휘자를
몇번이나 원했지만 막상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궁색한 변명을 대며
이를 거절했다. 베를린·쾰른 등에서 지휘자 요청이 들어왔을 때도
어떻게 하면 거절할까 하는 이유를 찾곤 했다.
브람스가 가장 닮고 싶었던 작곡가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이다.
베토벤은 단정치 못한 외모·무례함·사회적 관습의 무시 등이
특징이었으며, 슈베르트는 일관성 없는 사교·사회적 위축·여성에
대한 애매한 태도 등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이상화가 브람스의
태도와 고독을 조장했다. 브람스는 자신과 슈만을 동일시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로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와의 결속으로 그의 후임자가 되려고
했지만 클라라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클라라가 옳았다. 길들여진 외로움과 어떤 유별남을
필요로 했던 브람스의 천재성이 손상될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판단했던
것이다. 창조적인 일을 위해 자유를 가치로 삼고 독립을 필요로 하는
이 예술가에게 고정된 결혼이나 직업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스스로 강요하고 있던 독신생활은 외로움의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브람스의 여성에 대한 자제는 그가 10세 때 일했던
선술집의 성적으로 난잡한 풍토에서 연유되었을 수도 있다. 그는
매춘부를 돈으로 살 수 있는 향락적인 성행위에 대해 너무 일찍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일생 중 매우 어려운 시기에 슈만과 클라라 사이의
복잡한 성적인 관계 속에 빠져들었다.
이 실패해 버린 결혼 속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두
남녀를 다 만족시키려고 힘든 노력을 했다. “나는 당신 두 사람
모두와 함께 살 수 있을 굉장한 때만을 꿈꾼다.”
그의 이상적인 여성상이 클라라로 구체화되었지만, 자신 속에 있는
예술가적 기질은 자신을 절대 속박하지 않아야 한다고 어렴풋이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브람스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반했으며 연애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타적인 삶으로 고통스런 외로움을 극복하려했던 불행한 세월
고독에 대해 가장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책임감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브람스는 어려서부터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슈만과 클라라
가족에 대해 대단한 의무감을 보였다. 재정적 문제에 대해 너무나
관대했던 그는 부모·형제·양어머니와 그녀의 아이들까지도 부양했다.
그는 친구·낯선 사람·돈을 요구하거나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돈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음악가들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도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드보르자크에 대해 그는
다방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노골적으로 싫어했던
바그너에게까지도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브람스의 재정적 후원은 클라라에 대해서보다 더 확실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는 클라라가 금전적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매우 고통스럽게
생각했으며,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그녀를 도우려
노력했다. 한번은 거금을 그녀에게 주려고 했는데 그녀가 거절했다.
그러자 브람스는 슈만 기념 기금에 거금을 익명으로 기부함으로써
어쨌든 그녀에게 돈을 주는 방법을 찾았다.
1896년 클라라가 죽자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는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클라라의
장례식에 갈 때 브람스는 너무나 혼란스러워 반대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탔으며, 추도식 시간을 잊기까지 했다.
클라라가 죽자 브람스의 건강도 급속도로 나빠졌다. 결국 그는 간암
선고를 받았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많이 생각해 온
죽음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는 일을 정리하고, 가족과 친구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노트·편지·악보들을 없애고, 음악회에 참석하고,
그리고 놀랍게도 ‘오르간을 위한 11개의 합창 전주곡’을 작곡하는 등
가능한 한 죽음 직전까지 활동했다. 마지막 전주곡의 제목은 ‘오
세상이여 너를 두고 떠나야 한다’인데, 1897년 4월 3일 죽기 전에
짧게 씌어졌다.
그의 정서적 상태에 대해 의학적 결론을 내린 학자는 많았다. 어떤
이는 그를 성적으로 억제된 우울증으로 묘사했고, 누구는 분열성
(Schizoid) 성격으로 판단했다. 이 천재를 보통사람에게 적용하는 것과
같은 잣대로 잴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의 의학적 결론을 붙이자면
그는 회피성(Avoidant) 성격 위에 우울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종종
강박적인 행동들과 성급함을 보였고, 충동적인 면을 보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우울증으로 인해 그는 자주 피곤과 피폐를 느꼈는데,
이것을 이겨내기 위해 카페인과 니코틴을 사용했다. 그리고 점차
나이가 듦에 따라 더욱 유별나게 되어 덩치 큰 아이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는 50대에 이르러 갱년기 우울증이 왔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그의 건강과 창작성을 모두 방해했다.
빈곤으로 시작된 그의 삶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부유하게 되었지만
끝내 그 누더기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복잡하고 현학적이지만,
한편으로 단순하고 촌스럽기까지 했다. 또한 창작작업에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가족형성이나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에 할애할 시간과 에너지가
거의 없었던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타적인 삶으로
고통스러운 외로움을 이겨냈다.
박종호 /음악 칼럼니스트·정신과 의사
출처-슈만과 클라라(네이버 카페)
# by | 2006/07/20 13:30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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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enneagramlove/345 .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